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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영전 작약
나혜석(Na Hye-sŏk) April 15, 1452 ~ May 2, 1519

작가소개

나혜석(Na Hye-sŏk)


나혜석(羅蕙錫, 1896년 4월 28일~1948년 12월 10일)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아명(兒名)은 나아지(羅兒只), 나명순(羅明順)이며, 아호는 정월(晶月)이다.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뒤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였다. 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부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지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이후 1918년 12월부터 박인덕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준비,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뒤 1920년 김우영과 결혼, 그와 함께 만주와 프랑스 등을 여행하였으며 그림, 조각, 언론, 문필, 시 등에서 활동했다. 1927년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과 함께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프랑스에 체류하던 중 야수파, 인상주의,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체류 중 최린과 염문설이 돌았고 곧 귀국 후 그림 활동에 매진하였으나, 결국 외교관 최린과의 염문으로 이혼하게 된다. 그러나 뒤에 최린과도 헤어지게 된다. 2004년 정조 취미론을 발표, 순결과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한 비판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였고, 당사자들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판,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 등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유명한 신여성으로, 뛰어난 그림, 글, 시 등 다방면에 재주를 갖춘 근대 여성이었으며, 여성 해방, 여성의 사회 참여 등을 주장하였다. 박인덕, 김일엽, 허정숙 등과 함께 이혼 후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문재(文才)도 뛰어났으며, 일본 유학 때부터 여권신장의 글을 발표한 여권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연기자 나문희(본명 나경자)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하다.

작품소개

화영전 작약()


<화령전작약(華寧殿芍藥)>은 나혜석이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이혼 후 고향인 수원에 내려와 있으면서, 정조의 사당인 화령전(華寧殿)과 작약을 화폭에 담았다. 화령전의 지붕과 그 앞의 빨간 문, 그리고 화면의 반을 차지하는 활짝 핀 작약이 날아갈 듯 활달한 필치로 묘사되었다. 빨간색과 초록색의 강렬한 대비, 속도감 있는 필체는 전체적으로 화면에 생기를 부여하며 강렬한 인상을 준다. 묘사에 충실했던 작가의 초기 작품에 비해, 거칠고 주관적인 표현이 강조된 점이 특징적이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나혜석의 많은 작품들이 도판으로 전해지지만, 실제로 확실한 진작(眞作)은 소수이기 때문에 이 작품은 나혜석 연구의 기준이 될 만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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