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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수도사 The Monk by the Sea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April 15, 1452 ~ May 2, 1519

작가소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년 9월 5일 ~ 1840년 5월 7일)는 19세기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가장 중요한 풍경화가다. 그는 필리프 오토 룽게와 함께 초기 낭만주의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특히 중기 시대에 제작한 우의적 풍경화로 유명하다. 미술가로서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자연에 대한 성찰이었고, 상징적이고 반고전주의적으로 간주되는 그의 작품은 자연계에 대한 주관적 감정이 담긴 응답인 것처럼 보였다. 프리드리히는 당시 스웨던 영토였던 포어포메른 주의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그는 미술 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1798년까지 코펜하겐에서 수학을 했고, 이후에 드레스덴으로 이주를 했다. 그는 유럽 전역에서 물질주의적 사회에 대한 점증하는 환멸로 영혼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발흥하기 시작한 시기에 성년에 도달했다. 이 같은 정신적 태도에서의 변화는 자연계에 대한 새로운 재평가를 통해서 표출되었으며, 프리드리히, 윌리엄 터너 그리고 존 컨스터블과 같은 미술가들은 자연을'인간이 만든 문명의 인위적인 측면과 대립되는 신성한 창조물'로 묘사하려고 애를 썼다. 그 결과 프랑스 조각가인 다비드 당제르(David d'Angers 1788-1856년)와 같은 동시대의 미술가는 프리드리히를 '풍경화의 비극'을 발견한 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화가로서 출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기 시대에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만년에 그린 작품들은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사후에 그의 작품은 망각 속에 잊혀졌다가, 20세기 초 그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시작되었다. 1906년 베를린에서 그의 회화와 조각 32점으로 이루어진 전시회가 그에 대한 재평가의 시발점을 이루었다. 1930년대 나치가 정권을 잡게 되자, 나치의 문화당국자들은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북구 유럽적 특징을 구현한 작품으로 선전했다.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국수주의적 특징을 구현한 작품으로 간주한 나치의 오해로 인해서 그의 작품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한동안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87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프리드리히는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이며 국제적으로 중요한 화가라는 명성을 다시금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작품소개

바다의 수도사(The Monk by the Sea)


프리드리히는 이 작업을 2년 동안 진행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 구성은 땅, 바다, 하늘로 수평적으로 나누어져 있어 동시대인들을 충격에 빠뜨릴 만큼 명료하고 단순하다. 한 승려가 맨머리를 하고 해안가에 서 있다. 갈매기가 그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외로운 인물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광활한 바다의 납빛 암흑과 마주하고 있다. 물 위의 회색 구름 띠는 놀랍게도 그림의 위쪽 가장자리를 따라 푸른 하늘로 이어집니다. 이만큼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구성은 없었습니다. 그림의 주요 공간은 일종의 심연처럼 보입니다. 경계도 없고, 붙잡을 것도 없고, 단지 밤과 낮, 절망과 희망 사이를 떠다니는 느낌일 뿐입니다. 1810년에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는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이 그림의 마법적 매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죽음의 외로운 원의 외로운 중심. 두세 개의 신비한 물체가 있는 그림은 영의 밤 생각처럼 왠지 묵시적인 것처럼 보이며, 그 단조로움과 무한함은 프레임 자체에만 담겨 있기 때문에 이 그림을 묵상하면 눈꺼풀이 잘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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